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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공직선거

[칼럼] 남이장군 그 기상과 용맹

서현일보 정치칼럼

 

남이장군(南怡將軍)! 는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 진압에서 공을 세운 조선 초기의 장군이다. 

 

세조 3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무직을 역임하면서 경력을 쌓던 중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대장이 되서 구성군 준의 지휘 아래 진압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희대(稀代)의 기린아(麒麟兒)였다. 

 

출생부터 남다른 기운(氣運)을 타고나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젊은 나이에 죽었다.

 

사람들이 추모해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사당, 지명 또는 
허묘(墟墓)등이 전국에 산재해 오고 남이장군신이 모셔지면서 출생지에 대한 설또한 난무하고 있다.

 

세조 13년(1467년) 9월25일, 남이 장군은 강순·어유소 장군 등과 더불어 
1만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오랑캐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개선하는 길에 남이 장군은 백두산을 지나게 됐다. 

 

그때 장군은 북정가(北征歌)라는 시를 지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白頭山石磨刀盡) /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豆滿江波飮馬無) / 남자 나이 스물에 적을 평정 못하면
(男兒二十未平賊)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
(後世誰稱大丈夫).” 

 

압록강 유역의 오랑캐를 정벌한 장군은 백두산을 지나며 두만강 유역의 오도리를 생각한다. 

 

장군의 머리는 그 오도리를 정벌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장군의 생각대로 오랑캐와 오도리 모두의 정벌은 곧 광활한 만주벌판을 모조리 정벌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고구려와 발해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야심은 태조 이성계도, 성군 세종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야심을 장군은 자신이 이루겠다고 공언한 셈이었다.

 

조선후기의 성호 이익은 이 시를 논평하면서 
“뜻이 발호하고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것은 곧 장군의 거침없음이 마치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백은 
한 세상을 뒤엎을 만하네
(力拔山兮氣蓋世)”라고 자랑했던 항우와 같아서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당시 장군의 시를 접한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 기백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세조의 뒤를 이어 겨우 18세에 왕이 된 예종에게 장군의 북정가는 협박 또는 공포로 들렸을 듯하다. 

 

게다가 북정가에서 장군은 ‘남자 나이 스물(20대)에 적을 평정 못하면’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장군은 28세였으므로, 
앞으로 적을 평정할 시간은 2년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됐으나 신숙주, 한명회 등이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세력을 제거할 때 병조판서에서 해직됐다. 

 

예종 즉위 후 유자광에 의해 역모를 꾀한다는 모함을 받고 
고변 직후 예종은 장군을 대역무도로 몰아 능지처참했다. 

 

예종의 기백이 장군의 기백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이장군의   억울함은   
순조왕 18년   1818년해  복권되었다.
 
경기도 가평 남이섬에서 그를 만날수 있다.

 

 

서현정치연구소
이사장 정치학박사 김현욱

김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