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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공직선거

[칼럼] 아베 신조의 죽음과 일본의 역사반성

서현일보 정치칼럼

 

시모노세키
(下關)는 대마도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모든  경유지였다.

 

청일전쟁은 단순하게 일본과 청(淸) 사이에 벌어진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고, 조선과 조선인이 그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었다. 

 

또한 청일전쟁은 한반도 내에서 조선의 동학군을 진압한 전쟁이며 한반도의 물자와 인력을 일본이 강제로 차출해 치른 전쟁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때의 청일전쟁 후 강화조약의 주역이었다. 

 

이 청일전쟁의 핵심인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카쓰라 타로(桂太郞)'의

3인은 (야마구치)출신으로 조선의 숨통을 끊은 일본 제국주의의  역할을 한

일본의 대표적인 위인이다.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이 일본의 수도인 도쿄나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 등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의 주역들이 조슈번(야마구치) 출신으로

전쟁의 영광을 자신들의 고향에서 재현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며,

그것이 고향 조슈의 항구 도시인 시모노세키에서 있었던 것이었다.

 

청일전쟁은 충남 아산 앞바다의 풍도 해전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이것은 일본이 교묘하게 진실을 은폐한 결과이다.

 

7월 23일의 조일전쟁(朝日戰爭)

(경복궁 점령)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청일전쟁(淸日戰爭)(1894.7.25~1895.4.17)
대만정복전쟁(1895.5.10~11.30)

청일전쟁은 주로 청ㆍ일 양국의 군사대결 뿐만 아니고,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과 동학군 간의 조일전쟁(朝日戰爭)을 수반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청일간의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1894년 10월, 전라ㆍ충청도에서 전봉준ㆍ손병희 등은

동학군을 이끌고 조선을 강점한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개시하였다.

 

"이 동학의병의 항일 군사활동은 당시 요동ㆍ산동반도에서

청군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 측에서 볼 때는 후방을 교란하는 중대한 위험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동학병을 무력으로 조기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조선 관군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토벌전을 벌였다"

 

"일본에 대한 전쟁협력을 거부하자는 동학의 호소가 1894년 7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퍼져나갔다.
 
군용전신을 파괴하고 병참선과 병참부를 습격하는 동학군을 토벌하는 일은 청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동학 토벌의 귀추는 러시아군이 개입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가 위태로워질 수가 있었다. 

 

10월 무츠 무네미츠
(陸奧宗光) 외상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조선주재 공사에게 전보를 보내,

동학세력이 조선 북부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엄중한 주의를 촉구했다"

 

"전봉준을 맹주로 한 동학주력의 2차 무장봉기는 10월에 일어났다. 

 

11월부터 다음해 1895년 4월까지 동학군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탄압부대의 주력은 2700명의 일본군이었다. 

 

여기에 2800명의 조선정부군과 조선의 양반 사족 등이 참가한 민보군(民堡軍)이 가담하였다.

 

촌 구석구석을 수색하는 토벌작전을 계속하여 서남단인 해남, 진도까지 몰아붙였다.

 

문자 그대로 섬멸이었다.

 

5개월동안 농민군이 치룬 전투는 46차례, 농민군 참가인원은 연 134,750명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청일전쟁이었다"

 

조선의 동학군이 비록 낡은 전투장비를 갖춘 농민군이라고는 하여도 대규모 군대였으며

분명히 청일전쟁을 3국전쟁으로 불러야 하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1894년 8월 1일 일본은 정식으로 '청(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전쟁을 청일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일본은 선전포고에서 전쟁 상대국을 '청국 및 조선'으로 할지 아니면 '청국'만으로 할지 여섯 차례나 수정을 거듭하다가 결국 조선을 제외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것은 만약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조선정부를 일본에 협조하도록 만들지 못했다면 '청국 및 조선'이 전쟁 상대국으로 설정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7월 20일 오전 오토리 게이스케
(大鳥圭介) 공사는 조선주둔 혼성여단장에게 전투를 통한 왕궁점령, 국왕의 생포, 현정부의 타도, 대원군의 신정부 수립을 제안하였다. 

 

7월 23일 오전, 일본은 청국의 전신을 끊고 국왕이 거주하는 경복궁을 공격하였다.

 

건춘문과 춘생문 부근에서 몇 차례의 총격전이 벌어져 조선병 7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계획의 중심이었던 국왕(고종 황제)을 생포하였다."

 

이때 경복궁을 습격한 장본인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로  

며칠전 죽은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외증조부이다.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혼성 제9여단장으로서

조선출병에 파견되어,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황제를 생포한 후 청군 작전에 돌입했다. 

 

아베총리의 외증조부가 오시마 요시마사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후방안정이라는 형태로 동학군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명백해졌을 때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결정했다.

 

히로시마 대본영은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증파하면서 동학군의 학살령을 내렸다. 

 

공주, 장흥, 김제, 진주, 홍주성, 연산, 보은 등에서 자행된 학살은 무자비했다. 

 

그런 학살령의 발원지가 바로 히로시마 대본영이었다. 강제로 동맹조약을 맺은 조선정부는 관청과 막사를 일본군에 제공해야 했고, 행군로의 지방관은 일본군 장교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대본영은 조선 국토를 철저히 유린시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는 도쿄에서 출생했지만 정치적 고향은 야마구치(옛 조슈)다.

중의원의원, 관방대신, 외무대신을 지낸 부친 아베 신타로의 지역구인

야마구치4구(시모노세키ㆍ나가토)를 물려받았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외손자로 조슈의 극우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아베 총리의 죽음은 인과응보 [因果應報]이다.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이다.

 

 

서현정치연구소
이사장 정치학박사 김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