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대학에 입학한 저는 거의 대학 생활 4년을 학생운동에 참여한 시간의 나날이었습니다. 민주쟁취, 민족통일, 민중해방을 외치며 교정에서 또 거리와 광장에서 독재타도, 직선쟁취등 구호와 스크램을 짜며 목 놓아 외치고 또 외친 그 단어 민주주의 최루탄 가스에 울었고 애국가 제창에 울었고, 동지의 눈물에 울며 때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렇게 나의 청춘을 바쳤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초급장교 교육을 받을 무렵 이한열. 박종철 후배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적 헌신으로 6.29 선언을 통해 지금의 5년 단임제 개헌을 했습니다. 38년 동안 사용되고 있는 5년 단임의 권력구조 이제는 개헌과 정치개혁을 통해 시대정신과 다양성과 융합에 맞는 선진정치를 이루는 것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으로 차디찬 감옥에서 헌신과 희생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천한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예의입니다. 대통령 4년 중임제, 내각책임제, 이원집정부제, 결선투표제 도입등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진보적 실천을 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제22대 국회의 숙제이며 동서통합, 남북통합, 좌우통합을 위한 조국의 미래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지도자들 되길 기도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나라에서 선거와 정치에서 돈이 들어 가는것은 전세계의 공통사항이다.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마련 정치선진국처럼 모금을 통해 마련하는 방안의 제도와 시스템의 변경이 필요 할 것같다. 우리나라의 선거법은 참 많이 까다롭고 제한도 많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 좀 특이하다. 정치자금법과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 바른 정치가 양성을 위해 정치자금 모금 방식의 전환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정치가 출신 기업가들이 많이 배출되어 옳고 바른 후배 정치인들을 많이 후원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필자가 정치보다 기업경영을 선택한 이유도 젊은 혁신개혁의 바르고 거룩한 정치가를 양성하고 육성하며 정치학교을 통해 정치학습과 재정후원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자를 양성 하기 위해서 기업을 운영하고 경영 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등 정치선진국은 대기업과 재단등이 정치인을 양성하고 있고 여러가지 재정후원을 통해 정치인재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옳고 바르고 거룩하며 아름답게 빛나는 정치가는 오랜시간 길러 지는것이다. 우리는 늘 기업에 의존하고 개인에 의존해서 대기업괴 중소기업 또는 건설 시행사, 금융등의 기업에서 정치자금을 받아 쓰고 나중에 정치자금을 전달한 기업대표가 자신의 비리
정치적 갈등과 진영과 패거리들의 내전에 가까운 전쟁과 같은 대한민국 초 갈등 사회가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고 있다. 정당과 패거리와 진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대한민국 되길 소망한다. 이 모습 이대론 정말 대한민국 망한다. 연합과 통합과 연대와 공존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애국독립운동가 선열들에 부끄럽지 않은가? 광복절79년 기념식도 이제 이념의 갈등과 인사문제의 갈등으로 따로 기념식을 하게 되었다. 의료갈등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집권여권 내부에서도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복권문제로 분열의 씨앗으로 나아가고 있다. 조선 민족은 당파싸움으로 망하여 일제식민지배의 참혹한 역사를 만들고도 역사의 치욕과 수치를 잊지 말고 미래로 내일로 나아가야 하는데 안타깝다. 동서갈등, 남북갈등, 좌우갈등 패거리와 진영으로 나누어져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는 당파싸움의 내전이 나라를 망국의 길로 만들고 있다. 이런 모습 순국선열과 애국열사들이 목숨으로 지킨 이나라 이민족의 장래가 암울하다. 우리 민족은 무엇이 문제인가? 정녕 이런 모습의 당파싸움 언제까지 국민들이 나누어서 싸우고 다투고 서로 죽이는 대한민국의 망국병 정치 분야 되어야 하는가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평관면 평광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평광마을)에서 아버지 이질(李瓚)과 어머니 경주 박씨 박평암(朴平岩)]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공부를 하다가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로 활동하던 중 안창호 선생의 권유로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활동하였고 한국에서의 항일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될 상황에 처하자 중국을 거쳐 몽골로 망명했고, 이후 몽골의 고륜(울란바토르의 옛 이름)에 병원을 개원하였다. 1919년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할 때, 여비 전액을 지원했고,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여 새로운 폭탄 제조법을 전수하려고 하였고, 소련 공산당의 지원금을 받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책임도 맡는 등 독립운동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이태준은 몽골에서 몽골인이 고통받았던 전염병과 질병 치료에 헌신을 다해, 몽골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몽골 칸의 어의로도 임명이 되었다. 몽골 마지막 칸 복드 칸의 주치의였다고 하며,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세워 의료활동을 병행했다고
최루백은 고려시대 효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 세종 14년(1432) 왕의 명을 받아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그 덕행을 찬양하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란 책을 편찬·발간할 때, 그의 행적이 수록되었다는 사실로서도 그의 효행에 대하여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본관은 수원으로 戶長을 지낸 수원 최씨 始祖 최상저의 아들이다. 그의 나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 상저는 호장이라는 향리의 으뜸 구실을 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틈 있을 때마다 사냥을 다녔다. 그는 본래 성품이 어질며 재주가 있어 누구보다도 활쏘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근처 산에 돌아다니면서 활솜씨를 발휘하여 짐승을 자주 잡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최상저는 평시와 같이 활을 메고 산에 올라갔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서 산으로 접어들어 이리저리 올라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때 활을 쏠 준비조차 안하고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엄습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엉겁결에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급기야는 호환을 당하고 말았다.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동네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광경을 보고는 겁에 질려 떨고만 있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산중턱
정치개혁 반드시 필요한 우리사회의 큰 과제임에는 분명 국민들은 알고 있다, 필자 또한 16년전 공천 실패의 아픔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공천의 실패로 만43세의 젊은 나이에 무소속의 길을 선택하여 용인시장에 도전 했지만 낙선의 아픔과 정치의 쓴 잔을 일찍 경험 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이 꼬이고 미래가 전혀 다른 인생의길로 인도 되었다, 공천을 바로잡기 위해 철야농성과 삭발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불의에 항거 했지만 결과는 무소속 시장출마의 길을 선택했다, 김현욱 다운 선택이였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 비록 16년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용인시 곳곳의 각읍면동에 저를 선택하여 주신 수많은 지지와와 성원자들이 계신다, 하지만 공천탈락의 아픔과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당시 지구당 위원장이 복당이 되지 않아 도지사 출마를 포기하고 지금 교육감에 출마한 분 이다, 헝님,동생하며 미래를 약속했고 저의 아버님 장례식장에서도 공천을 약속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의 부덕의 소치도 있었겠지만 그날 그 공천탈락이후 나는 그 지구당 위원장을 만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공천의 아픔이였지만 필자는 다시 오뚜끼처럼 일어나
"미국 북동부 시카고에서 서부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항까지 이어지는 미국 최초의 동서 횡단 도로로서 총 3,945㎞ 길이이다. 1926년 그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한 세기 전 황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든 '49ers'의 후예들이 캘리포니아 드림을 품고 대륙을 가로질렀다. 그 도로를 따라,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 나오는 것 같은 외로운 술집과 식당과 모텔들이 들어섰다.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에서는 66번 국도를 'Mother Road'라 썼다. 1910년 인구 1,000명 남짓이던 네바다주 라스베가스가 1931년 카지노 합법화 이후 신기루 같은 불야성의 도시로 부푼 것도 그 도로 덕분이었다. 오늘날의 동서 횡단 여행자들은 이 'historic'이란 형용사가 붙은 쇠락한 66번 국도 대신 1956년 개통된 40번 고속도로 (40 Freeway)를 탄다." '로드트립'이라는 말은 미대륙 횡단 여행에 가장 최적화된 단어같다. 이렇게 하루 종일 무념무상으로 도로를 그저 달리는 것이 여행의 대부분이 되는 장소가 세상에 별로 없다. 10시간을 달려도 겨우 여행의 시작일 뿐인 커다란 땅이 있고, 그 넓은 땅에 차로 달리기 편한 도로가 모두 깔려 있고, 곳곳
영호남을 제외하고 수도권에서의 보수세력 대연합은 반드시 필요하며, 한 석이 아쉬운 국힘의 낮고 겸손한 자세와 마음가짐 매우 중요하다. 개혁신당의 공관위원장으로 김종인 박사의 등장은 국힘으로서는 매우 상황이 좋지 않다. 자만과 오만의 자세와 모습은 독이 될 뿐이다. 개혁신당 이준석+김종인의 조합은 젊은 20대~30대의 표심을 일정 부분 흡수하여 중도와 개혁보수의 표심을 잡을 수 있기에 국힘 성향의 중도 및 개혁보수의 표를 잠식 할 수 있다. 또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국민대통합당 등 중도보수, 개혁보수, 극우보수 지지층의 2%~3%가량의 표심 또한 국힘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 것이다. 선거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 양보, 배려, 겸손의 하나 된 원팀이 될 때 승리하는 것이다. 자유보수진영 또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도의 입법 취지에 부합하는 군소정당 보수자유세력과의 연합과 연대 시작해야 한다. 지역구에서 보수정당후보의 난립은 진보진영 후보를 돕는 길이다. 아직 선거가 44일 남았다. 어떤 실수와 악재가 나타날지 모른다. 국힘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원장.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정무감각과 미래 혜안으로는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힘이 들 것이다. 진보진영의
여러 나라를 다니며 방랑자 생활을 하던 공자가 아차 하는 사이에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농부의 밭으로 들어가 그의 농작물을 망쳐 버린 것이다. 이에 화가 난 농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끌고 가버렸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누가 가서 말을 되찾아 오겠느냐?" "제가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평소에 말주변이 좋다는 제자 자공이 선뜻 나섰다. 그러자 마부도 함께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이 일은 제가 말을 잘 지키지 못해서 생긴 일이므로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그래도 자공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자의 이 말에 자공이 어깨를 으쓱이며 농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자공이 아무리 입이 닳도록 빌고 설득해도 농부가 말을 되돌려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농부의 손에 잡혀 있는 말고삐를 강제로 빼앗아 올 수도 없는 일이어서 자공은 맥빠진 모습으로 그냥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마부를 내보냈다. 마부가 웃으며 다가가 농부에게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다같은 농부가 아니오? 내가 깜빡 조는 사이에 말이 밭으로 들어갔으니 미안하오 이해하시구려." 마부의 이 말에 농부가 허허 웃더니, 군말 없이 말을 되돌려 주었다. 유유상종이라 하여
(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를 초청해 가르침을 받을 때 이야기다. 맹자가 신하에게서 들었다면서 왕께서 희생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애처로워 양으로 바꾸라고 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새로운 종이 주조되면 희생물을 죽여 피를 바르는 흔종(釁鐘) 의식을 치르는데 끌려가던 소가 눈물을 흘렸다. 아무 죄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왕이 못 보겠다며 놓아주라 하고, 흔종을 '폐지하는 대신 양으로 소를 대체하라(何可廢也 以羊易之)'고 한 명령이 사실인지 물었다. 선왕이 그렇다고 답하자 맹자는 왕 노릇 하기에 충분하다고 칭찬을 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큰 재물을 아끼기 위해서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니, 소는 직접 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是乃仁術也 見牛未見羊也)." 애처로운 소의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 (惻隱之心)이 일어난 것이니 왕이 어진 마음을 갖고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양은 도살될 때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 없어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이 생사를 가른 셈이다. 맹자가 소의 눈물만 측은하게 생각하고 보지 못한 양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