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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공직선거

[칼럼] 독립운동가 이태준의 거룩한 삶

서현일보 정치칼럼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평관면 평광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평광마을)에서 아버지 이질(李瓚)과 어머니 경주 박씨 박평암(朴平岩)]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공부를 하다가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로 활동하던 중 안창호 선생의 권유로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활동하였고
한국에서의 항일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될 상황에 처하자 중국을 거쳐 몽골로 망명했고, 이후 몽골의 고륜(울란바토르의 옛 이름)에 병원을 개원하였다.

 

1919년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할 때, 여비 전액을 지원했고,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여 새로운 폭탄 제조법을 전수하려고 하였고,

소련 공산당의 지원금을 받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책임도 맡는 등 독립운동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이태준은 몽골에서 몽골인이 고통받았던 전염병과 질병 치료에 헌신을 다해, 몽골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몽골 칸의 어의로도 임명이 되었다.

 

몽골 마지막 칸 복드 칸의 주치의였다고 하며,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세워 의료활동을 병행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몽골인의 70%가 걸렸다던 성병 치료에 탁월했다고 한다. 

 

그리고 1919년 당시 몽골 정부는 수많은 몽골인을  질병으로부터 구한 위대한 의사 이태준에게 최고 훈장이었던 '에르데니인 오치르(Эрдэнийн Очир)'를 
외국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을 수여했다.

 

무엇보다 이태준은 몽골에서 의사로서 번 돈의 대부분을 한국의 독립운가들을 위해 사용하고, 자신의 병원은 몽골과 중국을 왕래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교통 등 편의를 제공하는 쉼터로 사용했다.

 

1921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몽골의 지배자였던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사병들에게 붙잡혀 피살됐다.
 
몽골에서의 위대한 의사 이태준의 삶이 있었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은 한국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꿈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한 독립운동가는 그의 책에서 몽골에서의 이태준의 삶을 이렇게 기록된다.

 

‘몽골에 있는 이태준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해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다.’

 

2006년 몽골 정부는 몽골 최고의 의사였던 이태준의 업적을 기리는 공원과 기념관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설립해 그를 향한 몽골인의 존경을 영원히 남기기로 했고, 이곳은 몽골과 한국 사이에 우정의 상징이 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2000년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기념비를, 2001년에는 기념 공원이 몽골 정부와 연세대 의료원, 연세대 총동문회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정치가 거룩하고
아름답고 우아하며 품격있어서
정치가의 거리와 기념비와 기념관이 세워지는 정치전문가시대를 
기대하고 소망 합니다.

 

 

서현정치연구소
이사장 정치학박사 김현욱